[등짐쟁이 기파리의 유랑]② 행복한 무진장 `진안고원길` 백패킹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 진안고원길 마을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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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트립 in 정기영 기자] 무진장(茂鎭長).

전라북도 동부지방의 경관이 수려한 무주, 진안, 장수의 세 지역을 일컫는 말이다. 그중 진안은 산이 많고, 산과 산 사이를 흐르는 물길이 마음껏 굽이진 곳이다. 섬진강의 발원지인 데미샘, 장수 신무산 계곡의 뜬봉샘에서 시작되는 금강의 물길이 이곳 진안을 흐르고 만경강 발원지인 밤샘도 진안 땅에 바짝 붙어 있다.

‘북한에는 개마고원, 남한에는 진안고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진안은 수많은 고갯마루 마을을 품고 있는 곳이다. 이 고원 마을들을 걷게 되는 ‘진안고원길’은 진안의 마을과 마을을 잇는 209km의 환형을 이루는 도보 트레일로 전체 14개 구간, 평균 고도 300m의 100개 마을 그리고 40개의 고개를 지나게 되는 길이다.



진안고원길을 걷기 위해 서울에서 진안으로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버스 시간대가 서울에서 전주로, 전주에서 진안으로 이동했다. 목적한 진안고원길 1, 2구간은 마이산을 바라보며 진안의 들녘을 걷는 길로 시작은 진안 버스터미널에서부터다. 둥글둥글한 화살표인 진안고원길 이정표는 노란색은 순방향, 분홍색은 역방향을 가리킨다. 도로를 지나가는 버스마다 보게 되는 ‘행복한 무진장’. 이 단순한 글귀가 은근히 중독성이 있는지 버스를 볼 때마다 나도 모르게 따라 읽게 되었다.

사양천을 따라 만난 ‘성산수풀’은 수백 년 전부터 숲이 우거져 진안천이 물길을 마주하고 있는 곳이다. 홍수 때에는 물길이 진안 읍내로 직류하는 것을 막는 방재림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마이산 북부 주차장을 지나 사양제에 오르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역시 뾰족 올라온 마이산(馬耳山두)의 두 봉우리이다. 뾰족하게 생긴 봉우리는 수마이산, 둥글고 넓게 생긴 봉우리는 암마이산. 사양제에서 바라보는 마이산은 전형적인 말의 귀(말마 馬, 귀이 耳) 형상이었다.



연인의 길이라 불리는 애기단풍 나무숲 터널을 지나 계단을 따라 오르면 마이산 두 귀 사이의 ‘금강의 시작’을 알리는 최상류 물줄기를 만난다. 반대편 계단을 내려와 은수사에 도착했다. 조선 태조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꿈꾸며 기도를 드렸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마이산 탑사로 내려간다. 풍화작용이 만들어 낸 독특한 풍경인 타포니 지형은 어느 기인이 수많은 날을 공들여 쌓았다는 탑사와 어우러지며 이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예전의 고요함은 잊힌 지 오래인 관광지가 되었다.



산길을 걸어 마을로 넘어가야 하지만 점심을 먹기 위해 차도가 있는 식당가로 내려섰다. 식당가에서 차도를 따라 내려가는 길은 길가 양쪽으로 아름드리 벚꽃 나무 길이다. 봄이면 남도 최고의 벚꽃 명소로 많은 사람이 찾는 곳이지만 벚꽃놀이가 끝나면 한가하기 짝이 없다. 벚나무 가로수길 끝 화전교에 이르러 진안고원길 이정표를 다시 만났다.

중동마을의 가로수인 자두나무를 보았다. 아주 조그마한 열매 때부터 빨간색을 띄는 자두열매가 신기한 나는 영락없는 서울 촌년이다. 원동촌 마을을 지나 오늘의 목적지인 백운면사무소까지 가는 길은 마령의 들판을 옆구리에 끼고 걷는다. 가을이면 들판의 벼가 누렇게 남실대는 모습이 장관인 곳이다. 넓디넓은 마령 들판을 지나 도착한 마령면사무소는 진안고원길 1구간의 끝이다.



마령면사무소 근처, 잠자리를 찾으려고 마을을 돌아다녀 보지만 텐트를 칠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 좀 더 걷거나, 좀 덜 걸었으면 걷다가 만난 마을 정자에서 하루 저녁 신세를 질 수 있었을 텐데. 어딘가의 후기로 보았던 노인정 앞 평상을 사용하기 위해 이장님께 연락을 드려 사용 허락을 받았다. 길가 옆 정자이지만 갈대로 만든 발을 쳐놓으신 덕분에 제법 운치가 있는 잠자리가 되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밤하늘을 보았다. 가로등이 켜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고원이라는 명성답게 별이 그야말로 내 눈앞에 우수수수 쏟아졌다.



두 번째 날은 마령면사무소에서 출발해 백운면사무소까지 걷기로 했다. 어제 뜨거운 햇볕에 지쳐 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걷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 길을 걷는 느낌이 참 좋다. 아직 모를 내지 않은 물댐이 논에 마령의 하늘과 산이 담겼다. 봄의 논은 캔버스처럼 논, 산, 들녘, 마을, 농부를 그대로 그려 놓는다.

계남마을 입구 모정(茅亭)에서 배낭을 내려놓았다. 더위 때문인지 배낭을 메었던 등이 축축하다. 전라도 지방을 걷다 보면 마을마다 더위를 피하고자 짚이나 마른 풀로 지붕을 덮어 만들어 놓은 작은 정자인 모정(茅亭)을 만난다. 모정은 마을 분들이 쉬는 곳이기도 하지만, 트레일 백패킹을 하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마을 주민들께 허락을 얻어 하루 저녁을 머물 수 있는 좋은 잠자리이기도 했다.



5월은 멍석딸기라 불리는 오디의 계절이다. 길가 가로수처럼 자란 주인 없는 오디나무에 다닥다닥 열려 까맣게 익은 오디를 만나면 조금씩 따먹으며 걸었다. 딱 먹을 만큼만. 물컹한 달큼함에 재미로 먹는 오디 열매에 잠시나마 뜨거운 햇살을 잊는다.

솔밭 거리, 빨간색 양철지붕의 물레방아를 지났다. 걷는 동안 내내 보였던 내동산 줄기를 뒤로 할 즈음 오늘 길 걷기를 마무리하는 백운면사무소가 있는 번암 마을로 들어섰다. 나름 부지런히 걸었는지 진안으로 가는 버스 시간이 생각보다 많이 남았다. 흰 구름이라는 뜻의 백운(白雲)면 버스 정류장에서 한껏 여유를 부린다. 마을 입구 마트에서 맥주 한 캔과 진안 막걸리 사서 마시고, 경찰서 화장실도 들르며 동네도 돌아본다. 버스가 왔다. 진안 터미널로 가는지 확인코자 여쭈니 “이 차는 안 가고 2시 넘어오는 차가 갑니다.”

진안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서울행 버스를 타려던 계획은 그냥 계획이 될 뻔한 순간. 마음이 급해지며 택시를 수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내 마음과는 다르게 백운면에는 있던 택시도 없어졌고, 진안 시내에서 택시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금방 섭외되었다. 택시 안, 나도 모르게 걷는 내내 보았던 찔레꽃을 생각했는지 노래를 흥얼거렸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 나라 내 고향~”. 택시를 섭외했을 때의 급했던 마음은 어디로 갔는지 창문을 통해 흘러 들어오는 진안고원의 바람이 참 곱고 좋은 게 고원길을 걸으며 만났던 풍경들이 오버랩 되며 ‘행복한 무진장’은 이런 것인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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