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짐쟁이 기파리의 유랑]③ 황금의 섬에서 제주를 바라보다, 가파도 백패킹

제주 가파도 백패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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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트립 in 정기영 기자]

“바람에 일렁이는 황금빛에 출렁,

새파란 바다 빛에 하늘이 퐁당,

바다 건너 한라산과 오름을 바라볼 수 있는 섬”

비행기를 타고 섬으로 가고, 그 섬에서 다시 배를 타고 이동했다. 제주도 여행은 늘 특별한 계획 없이 여행 당일 날씨에 맞춰 즉흥적으로 목적지를 결정하곤 했는데 늦은 봄의 제주도 여행에서는 좀 특별한 곳을 선택했다. ‘청보리의 섬 가파도’가 그곳이었다. 세찬 바닷바람을 이기고 겨우내 잘 버텨준 보리가 초록초록해지면 가파도의 봄이 시작된다. 사람들은 초록을 보기 위해 가파도를 찾지만, 어느 해인가 청보리 축제 때 이 섬을 찾았던 기억은 섬에 머물렀던 몇 시간 동안 시끄럽고 북적이던 소리에 내내 불편했었다.



그런 기억 때문이었을까. 계절 좋은 날, 한가한 가파도를 찾고 싶었다. 훑듯이 지나가는 사람들과 풍경을 나누고 싶지 않았던, 순전히 내가 보고 느끼는 것으로 기억하고 싶은 욕심이 앞섰다. 어쩐지 가파도는 초록이 지나도 좋을 것 같았다. 황금 보리밭 계절. 이 계절이 지나면 다시 일 년을 기다려야 하는 가파도의 황금 보리밭을 보기 위한 걸음은 그렇게 시작이었다.

청보리 축제가 끝난 가파도는 한산했다. 어디에서부터 걸을까. 올레 코스를 따라 걷지 않고 발길 닿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걸으며 하루 저녁 머물 곳을 찾기로 했다. 이 계절에 가파도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신이나 마을까지 걸어가며 멈추기를 수십 번, 걷기보다 한눈팔기가 우선이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구멍 숭숭 뚫린 검은 돌담 안에서 황금빛이 담을 넘을 듯 넘실댔고, 뒤를 돌아보면 송악산과 한라산이 있는 제주도 본섬이 아릿하게 보였다.



보리가 영글기 시작하면 초록의 가파도는 황금의 가파도로 변한다. 바다를 바라보는 밭에서는 제주 바다가 만들어낸 바람이 황금 보리와 마주치며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몸을 살짝 낮춰, 보리와 눈 맞춤이라도 하면 또 어떻고. 가파도의 해안과 황금 보리가 만나 부서지면 파도마저도 황금빛으로 변했다. 이 계절의 가파도 앞바다는 내가 이제껏 기억하던 제주도의 푸른 바다가 아니다. 금빛의 계절, 가파도는 금가루를 만들어 여기저기 뿌리는 요술을 부리는 섬이 된다.

마을 안 가파도 파출소에서 화장실 사용을 하며, 섬을 돌아볼 동안 배낭을 맡겨도 되겠느냐고 슬그머니 여쭈었더니 흔쾌히 맡아 주신다.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는데 이곳을 오며 봐두었던 집이 있었는지 일행이 담이 없는 마당에 평상이 놓인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소라와 해삼을 주문한다. 평상에 앉아 잔잔한 가파도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새 테이블 위 접시에는 가파도 해녀가 채취한 바다와 여행의 정취가 차려졌다.



낮술 한 잔까지 더하니 안 그래도 좋은 가파도가 더 좋아지기 시작했다.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살짝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섰다. 해수면보다 낮고 평평한 이 섬에 우리가 생각하는 언덕이 있을 리 만무하지만, 섬의 다른 곳보다 높다면 그곳이 곧 가파도의 언덕이었다. 공사로 인해 마구 파헤쳐지고 가파도라는 돌비석까지 있는 이곳은 가파도 전체와 제주도 본섬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숙영지로 삼을까 잠시 고민을 했지만, 공사장의 어지러움과 들쥐의 흔적으로 인해 이내 포기다.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며 만난 풍성한 갯바위를 가진 평지가 보이면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여기다’라는 말이 터져 나왔다. 마치 구슬을 받치고 있는 듯 송악산에 산방산이 쏙 들어간 모습은 이곳이기 때문에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한라산은 제주도의 어느 곳에서라도 볼 수 있지만, 바다에서 불쑥 올라온 듯 해안 절벽을 가진 송악산, 둥그런 산방산과 그 주변으로 펼쳐진 모슬봉, 단산, 군산, 형제섬까지 한눈에 볼 여러 곳이라니. 말이 필요 없는 곳이었다. 하늘은 파랬지만 미세먼지 탓에 바다 건너 풍경들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아도 제주도 본섬에서는 마주할 수 없는 풍경들을 볼 수 있는 곳.

일행들은 한껏 탄성이다. 숙영지를 결정한 후 배낭을 가지러 오가면서 섬을 구석구석 헤집듯 다녔는데도 마지막 배 시간까지 시간 여유가 남았다. 섬 백패킹을 할 때는 숙영지를 결정해도 바로 텐트를 펼치지 않는다. 관광객을 실은 마지막 배가 섬을 떠나야 하루 저녁 머물 잠자리를 펼치는 건 섬을 여행하면서 지키는 내 나름의 원칙 탓이다.

배낭을 내려놓으니 시장기가 돌았다. 가파도 유일의 짜장면집에 전화를 걸어 짜장면과 한라산을 주문했다. 톳이 들어간 초록색 면의 짜장면을 1회용 기가 아닌 가게에서 쓰는 그릇에 담아 배달해 주신 덕분에 쓰레기 걱정을 덜었다. 제주 본섬을 바라보고 먹는 짜장면 맛을 어느 산해진미와 비교할까. 맛으로도 맛있고, 눈으로도 맛있으니 한라산이 호로록 눈으로 입으로 잘도 넘어갔다.

그러는 사이 마지막 배가 본섬으로 출발하는 소리가 들려 배낭을 풀어 하루 저녁 머물 집을 지었다. 그것도 가파도 최고의 조망처에서. 해가 제집으로 돌아가고 가파도에 어둠이 내렸다. 제주 본섬에서 흐르는 불빛이 바다를 물들였고, 모슬봉의 군기지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검은 허공에서 흔들렸다. 보리밭이 있는 곳에 올라 마을을 바라보니 네온사인 간판이 하나도 없는 가파도는 깜깜하고 고요함이 감쌌다.



텐트 안에 누워 듣는 갯바위에 찰랑대는 파도 소리는 듣기 좋은 귀 간질거림므로 다가왔다. 잠시 조용했던 바다는 밤샐 준비를 마쳤는지 이내 분주해졌다. 조그마한 어선들이 내뱉는 통통거리는 엔진 소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소리였다. 새벽녘, 잠이 깨어 텐트 밖으로 나가보니 바다가 전등을 켠 듯 환하며 장관이 펼쳐졌다. 매번 먼 곳에서 바라보던 제주 앞바다의 밤 풍경이 내 눈앞에서 펼쳐진다니.

날이 밝은 후 몸을 일으켜 보리밭이 있는 길섶으로 올랐다. 그래 봤자 스무 걸음도 안 되는 곳. 숨을 들이켜니 바다 냄새와 이슬에 젖어 비릿하면서도 구수한 보리 냄새로 코가 벌렁거렸다. 가파도에서 맞는 아침은 그랬다. 잠이 덜 깬 머리는 달달한 다방 커피 한 잔으로 깬 후 첫배로 제주 본섬으로 가기 위해 짐 정리를 끝내며 머문 흔적이 남지 않은 걸 확인 후 선착장으로 향했다.



누가 가파도를 초록의 청보리 섬이라고 했을까. 혼자 실컷 보려고 꼭꼭 숨겨 놨던 가파도의 황금 보리밭과 제주 본섬의 풍경들은 막걸리 한 잔, 해산물 한 접시에 풍경 나누는 인심을 팍팍 쓴다고 해서 사라지거나 닳지 않았다. 배를 타는 내 손에 들린 건 집에 가면 끓여 마시려고 구매한 가파도 청보리로 만든 보리차였다. 가파도를 떠나는 배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섬이 멀어지는 게 아쉬워 봉지를 들어 보리차 냄새를 맡는 나를 본 일행의 웃음소리가 바다 위로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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