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짐쟁이 기파리의 유랑]⑤ 저 산줄기의 끝은 어디일까 방태산 구룡덕봉

겨울왕국 방태산
정감록 3둔 4가리의 오지 월둔마을
백두대간 트레일

[이데일리 트립 in 정기영 기자] “겨울에는 눈이잖아요.. 눈 보러 가야죠.”

임도를 따라 오르는 등짐걸음은 ‘눈’이라는 한 단어부터 시작되었다. 저질의 체력이라도 설마 묻히겠나 싶어 그를 따라 나섰다. 8년만이다. 모두가 아침가리 계곡으로 넘어갈 때 월둔재 쪽으로 왔던 그 길을 계절이 수십 번 바뀌어서야 다시 왔다. 오래된 기억은 실낱같이 가늘어졌고 걸음은 처음 시작하는 백지장 걸음이다.

홍천에서 점심을 먹고 출발을 했으니 시작부터 늦었다. 해가 나지 않은 흐린 날이었지만 걷는 내내 쌓인 눈으로 인해 고개를 떨궈 발끝만 보고 걷기 시작했다. ‘쌓인 눈이 반사되어 시릴 정도로 눈이 아파서’라는 건 핑계였다. 고개를 들지 않은 건 한 눈에 봐도 쉬워 보이지 않는 까칠스러운 개인산 줄기의 위압감에서 자유롭고 싶어서였다.

월둔마을의 월둔교에서 시작하는 길. 백두대간 트레일 중 인제 6구간에 속하는 길로 동계를 제외한 나머지 계절에는 사전 신고 후 걸어야 하는 길이다. 식생 보존과 산불방지를 목적으로 5월부터 10월까지 하루 100명에게만 예약, 개방되는 트레일이지만 겨울에는 걸음이 비교적 자유롭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듯 잔뜩 찌푸렸지만 걸으니 몸에서 열이 나는지 두껍게 입은 옷 안쪽으로는 땀이 질질 흐른다.

간혹 고개를 들어보면 하나, 두울, 세엣, 한복 치마 주름 접히듯이 산자락이 접혔다. 월둔재 삼거리에서 구룡덕봉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르는 방향을 따라 계속 걸으면 아침가리가 시작되는 조경동교를 만나게 되지만 오늘의 목적지지가 아니기에 마음을 접는다. 느린 걸음으로 두어 시간동안 걸었으니 잠시 배낭을 내려놓고 어깨를 쉬어주었다. 아무리 가볍게 패킹한다고 해도 50리터 동계 배낭은 물을 포함해 12kg 정도라 결코 가볍지 않다.

눈이 담뿍 쌓인 겨울 산. 나무가 겨울을 나기 위해 제가 가진 것들을 다 비워내는 나목이 되면 그 시린 몸뚱이를 감싸 안듯 하얀 옷으로 입혀주는 눈이 있어 겨울산은 더 멋있다. 반복되는 산허리 임도가 마술을 부리는지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산은 생각보다 어둠이 빨리 찾아왔고 결국 배낭 헤드에 넣어 두었던 헤드랜턴을 꺼냈다. 그리고 정말 얼마 가지 않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5시간 40분. 남들은 서너 시간이면 간다는 그곳을 느리고 길게도 올랐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했다면 눈물을 왈칵 쏟았을 것 같은 이 먹먹한 느낌은 또 뭐지. 재빨리 텐트 펼친 후 좁은 텐트에 몸을 구겨 넣듯 들어가서는 먹을거리를 찾았다. 긴 시간 이동하는 동안 제일 힘들었던 건 할딱거리는 숨도 아니었고, 무거웠던 배낭도 아니었다. 바로 뜨겁고 진한 커피 한 잔이었다. 언제부터 커피 마시고 살았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몰랐지만 꿀맛보다 더 맛있는 커피 한 잔에 힘들었던 하루가 봄눈 녹듯이 싹 녹아내렸다.

텐트 안에서 살짝 지퍼를 열고 밖을 내다보니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얘기 한 자락, 사락사락 내리는 눈, 음악, 좋은 사람. 편하고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주어진 것에서 최대한 만족감을 느끼는 게 백패킹의 매력임을 우리는 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지만 자면서도 생리현상은 어쩌지 못하고 밤중에 텐트 밖으로 기어 나와 보니 눈이 제법 내린다.

아침 6시 40분. 텐트 지퍼를 빠꼼 열고 밖을 내다보니 구름이 하늘을 잔뜩 덮었다. 오늘은 일출 보기 글렀다며 속으로 혀를 차고는 무슨 생각인지 텐트 밖으로 나가 어슬렁대다가 허벅지까지 발이 푹 빠졌다. 바람이 만들어 놓은 눈구덩이에 다리가 파묻혔는데 웃음이 났다. 겨울이잖아, 눈이잖아. 텐트를 펼친 구룡덕봉 헬기장 앞뒤로 높은 산군들의 장쾌한 능선들이 날을 세우듯 깃을 펼쳤다.

정확히 1/2. 내 눈 앞에 펼쳐진 자연이 그린 그림의 비율이었다. 어제 저녁부터 내리는 눈은 모처럼 이쪽 산군을 덮어줄 모양인지 민둥머리 계방산 정상을 눈구름이 휘감았다. 우리가 어제 올라왔던 저쪽 어느 골짜기에도 하얗게 상고대가 피어났다. 텐트 뒤쪽으로 펼쳐진 방태산 자락과 그 너머 설악산에도 눈구름이 자리하기 시작했다. 모처럼 내리는 눈이 맨숭맨숭한 산을 덮어줄 모양이다.

눈 내리는 풍경을 보면서 먹는 빵 한 조각, 스프 한 컵. 조식에 호사도 이런 호사가 없다. 짐을 정리 후 구룡덕봉 정상에 오르니 눈은 그 기세가 사나워지면서 볼때기 싸다구를 날렸다. 살아있는 눈송이가 만들어내는 하얗게 덧칠이 되는 설국. 탐방로는 선행자의 희미한 발자국 표시를 따라가다가 한 발자국만 옆으로 가도 발이 푹푹 빠졌다. 비박배낭을 맨 탓에 둔한 몸뚱이가 거북이 뒤집어지듯 자빠져서는 파닥파닥. 이런 오랜만의 상황이 즐거워 괜스레 발을 헛디디는 척 눈밭에 빠뜨리고는 바지가 젖거나 말거나 헤벌쭉 거렸다. 습설이라 걷다가 발이 무거우면 멈추고는 발끝을 툭툭 치며 눈덩이 털기 바쁘다.

월둔재를 내려오기 전. 눈구덩이에 처박혀 안간힘을 써대며 엔진소리를 으르렁대는 오프로드 차량 몇 대를 잠시 만났을 뿐, 길은 여전히 둘이 전세를 낸 듯 조용하다. 걸으며 입안에서 흥얼거렸던 음악이 국이의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하와이의 전설인 ‘이즈라엘 카마카위올레’의 우크렐레 반주로 흐르는 ‘Over The Rainbow’. 말이 필요 없었다. 짙은 하늘 아래 굵고 나지막하게 울리는 이즈의 노래가 우리의 마음을 대신해 주는 듯 했다.

마치 우리가 눈구름을 달고 온 듯 산 위부터 내리던 눈이 산 아래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눈 위에서의 하룻저녁은 세상이 보이든 말든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이었다. 계속 되는 오르막에 10% 체력이 끝까지 10%였던 구룡덕봉 가는 길이었지만 겨울이 이렇게 끝나간다고 해도 우리는 결코 아쉽지 않다. 눈과 함께 하는 달콤한 겨울의 아름다움을 맛봤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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