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우의 제주살이] ②애월의 숨겨진 비경인 납읍난대림지대, 금산공원

원시의 모습이 보존된 납읍난대림 지대
선비들이 시를 읊었던 송석대와 인상정
유교식으로 마을제를 올리던 포제단이 숲 안에 있어
제주 올레 15코스가 지나가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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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트립 in 진서우 기자] 작은 숲으로 알고 왔다. 하지만 마주 선 숲은 오래된 숲이었고 거대한 숲이었다. 마을과 수백 년을 뒤엉킨 채 신비를 간직한 숲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납읍난대림’이라 부르는 숲의 또 다른 이름은 ‘금산공원’이다. 노꼬메오름에서 흘러내린 용암이 애월 곶자왈의 끝자락에서 멈춘 곳이다. 숲에는 상록활엽수림이 울창하고, 후박나무와 종가시나무, 곰솔이 숲의 주인이다. 금산공원은 여행자들에게 주목받지 못하는 숲이다.

도시에서 제주로 이주한 지 두 달째다. 제주살이는 외로웠다. 해가 지면 땅거미가 삽시간에 내렸고, 불 꺼진 동네에서 습관처럼 새벽까지 깨어 있었다. 이곳에서도 나는 방황을 멈추지 못했다. 시집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촌장은 도서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거실 내 책상에서 끄적이는 것을 좋아한다. 해가 지도록 촌장이 오지 않으면 대화를 나눌 사람이 몹시 그립다. 도시에서는 겪어보지 못한 적막한 생활이다. 촌장을 꼬드겨 숲으로 갔다.

숲은 낮은 돌담으로 에워싸여 있다. 돌담으로 숲과 마을이 구분되어 있다. 그 너머로 마을길이 지나고, 초등학교가 있고, 비닐하우스와 집이 있다. 마을이 커지고 경작지가 늘어나면서 숲이 줄었다. 문득 마을 아이들이 부러웠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원시림을 놀이터로 두었으니 말이다. 중산간 코스인, 제주 올레 15코스는 한림항에서 시작해 고 내 포구에서 끝난다. 대략 중간쯤에 금산공원이 있다. 수 킬로미터를 걸어와서 지친 여행자에게는 달콤한 휴식이다.

동네 입구에 ‘선비마을’이라고 새겨진 큰 바위가 눈에 띄었다. 왜 선비마을일까 생각했는데 숲에 오니 알겠다. 납읍리는 전통 있는 유림촌이었고 마을 사람들은 큰 자긍심을 갖고 있었다. 금산공원에 들자마자 숲길 양쪽에 널찍한 정자가 두 개 보였다. 인상정과 송석대다. 마을 선비들이 시를 읊고 글을 지었던 정자다. 지금은 납읍 초등학교 학생들의 시화가 걸려 있다. 여름에 돗자리 하나 들고 와서 초록이 흘러내리는 후박나무 아래에서 오수에 빠진 나를 떠올려본다. 생각만으로도 시원하다.

숲 안에는 포제청이라는 건물이 있다. 이곳에서 해마다 음력 정월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납읍리 마을제’를 지낸다. 정교하게 현무암을 쌓아 올려 벽을 만들고 그 위에 기와를 얹은 모습이 단아하다. 돌담과 숲의 조화가 아름답다. 오래된 팽나무와 후박나무가 서있는 마당에는 지난가을 떨어진 낙엽이 무심히 뒹굴고 있다.

궁금한 생각이 들어 ‘납읍리 마을제’에 대해 신문기사를 찾아보았다. 제주도에 전래되고 있는 마을제 가운데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고 규모가 크다고 한다. 제주 무형문화재 6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마을의 모든 의례는 유교식으로 진행된다. 사진 속에는 옛날 그대로 의관을 차려입은 마을 사람들이 제사를 올리고 있다. 커다란 돼지가 통째로 제상에 올려져 있는 모습도 보였다. 구경하지 못한 게 아쉬웠다.

숲은 원시의 모습 그대로다. 사람들이 기억할 수 없는 시간이 흘렀던 걸까, 아니면 숲의 시간은 사람의 시간과 다른 걸까? 숲의 나무들은 천년을 살아온 듯한 모습으로 서 있다. 곰솔과 후박나무와 종가시나무가 공중을 점령하고, 땅 위 세상은 마삭줄기와 쇠고사리, 그리고 알 수 없는 풀들이 흙을 덮었다. 나는 수없이 걸음을 멈추고 삼각대를 세워 낯설면서도 정겨운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숲의 나무들은 공중에 길을 만들어 끝없이 가지를 뻗어 가고 있다. 허공에서 사라진 나무의 끝을 보고 싶지만 잎사귀 끝에서 부서지고 있는 햇살이 눈이 부셨다. 마삭줄기들이 나무를 타고 오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초록을 뒤집어쓰고 있다.

나무들은 하나같이 괴이하다. 익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종가시나무와 후박나무도 이곳에서는 낯설었다. 오랜 시간을 버텨온 두툼한 몸통은 흉터투성이고 갈라져 있다. 가지는 기이하게 굽었다. 밑동에서는 국수 가닥 같은 줄기들이 솟구쳐 있다. 초록 잎들은 하늘을 가렸고, 한낮인데도 숲은 어둑했다. 금산공원은 생성과 소멸이 공존하는 숲이 아니었다. 어린 나무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층위가 다양한 수종이 함께 자라야 건강한 숲인데, 금산공원의 나무들은 함께 태어나서 긴 시간을 살아온 듯하다.

산책로가 너무 짧다. 촌장과 나는 아쉬운 마음에 숲에 난 모든 길을 왔다 갔다 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숲에서 놀았다. 후박나무숲과 종가시나무숲에 바람 드는 소리를 들으며 걸었다. 울퉁불퉁 현무암에 난 이끼의 감촉을 느껴보고, 데크 기둥을 타고 오르는 덩굴들에게 손끝으로 마음을 전했다. 평상에 앉아서 나무 틈새로 하늘도 올려다보았다. 미세먼지로 흐린 날인데도 숲의 공기는 상큼했다.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가 내가 흥얼거리는 콧노래 같다. 수다스럽다. 행복했다. 촌장이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눈팔며 걸었다. 많은 사람들이 ‘숲’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나도 그랬다. ‘숲’을 소리 낼 때 공기를 훅 빨아들이면서 닿는 입술의 촉감이 좋다. 숲의 초입에서 들려오던 새소리가 숲을 빠져나갈 때까지 음악처럼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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